싸움의 종교가 된 한국 개신교
“기독교(개신교)인들은 너무 전투적이에요.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아요.”
몇 해 전, 필자가 ‘비기독교인들’이 주축인 어느 정기모임에 참여했다가 다른 참여자에게 듣게 된 말이다. 그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정답을 독점한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 여타 주변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는 서로가 서로를 관용하고 이해하며 자연스레 대화의 물줄기가 흘러가지만, 이상하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거의 모든 대화가 도끼로 자르듯 뚝 끊긴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인인 필자도, 그가 이야기했던 답답한 경험을 주변의 기독교인들을 통해서 동일하게 겪어보았다.
기독교인들이 교회 바깥에서 진행되는 여타 모임에 참여하면 트러블메이커(Trouble Maker)가 되기 일쑤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이따금씩 투쟁적이고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패하고 타락한 기득권 종교인들을 질책하시는 모습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기독교 신앙에서 멀어 보였던 사람들, 즉, 세리와 죄인들을 되려 사랑으로 대하셨다. 그런데 왜 ‘복음’을 담지하고 있는 교회는 한국에서 ‘사랑의 종교’가 아닌 ‘싸움의 종교’가 되어버린 것인가? 이러한 고민들 끝에서 찾아낸 답은, 문제의 근원이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근본주의 신학’에 있다는 것이다.
근본주의 신학이란?
근본주의 신학은 19세기 미국에서 태동했는데, 그 취지는 좋았다. 세속화의 물결이 거세지고, 자유주의 신학의 힘이 커지자 정통신앙을 수호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생겨났다. 여기서 정통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 바로 ‘근본주의 신학’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이 전체 신학 지형도에서 양극단의 한편을 맡고 있다면, 근본주의 신학은 또 다른 한편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극단에 위치한 모든 것이 그렇듯, 근본주의 신학이 지닌 해악성은 매우 명확하다. 근본주의 신학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축자영감설’에 대한 신봉이다. 말 그대로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에 ‘성경이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 맥락에서 근본주의 신학은 현대신학의 연구 결과나 해석을 모두 부정하고, 종교적 견해에서 자신들과 차이가 있는 사람을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문자적 무오성과 거기서 파생된 교리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분파적 성향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적 주장이 근본주의 신학이 지닌 성속의 구분이나 반문화적인 성격으로 이어진다. 근본주의 신학은 신앙이라는 이름을 매개로 배타성과 폭력성을 배양해내기 쉬운 환경을 만든다. 교회 바깥의 세상이 ‘투쟁의 공간’이 되고, 그 안에서의 배제와 폭력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 되는 것이다. 또한 성도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자아내는 종말론을 믿게 만든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철저히 배척하셨던 율법주의적 신앙의 문법을 따르게 만든다. 근본주의 신학이 지닌 해악이란 그것이 막아내려고 했던 세속화의 물결만큼 매우 위험한 내용인 것이다.
근본주의 신학, 복음주의의 탈을 쓰고 한국교회를 집어삼키다
문제는 이러한 근본주의 신학이 ‘복음주의’의 탈을 쓰고 한국교회를 집어삼키고 있다는 점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한국에 뿌리내린 근본주의 신학은, 그와 다른 주장을 하는 목사와 신학자들을 징계하고 배척하면서 한국교회에 내재되어 왔다. 그 결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근본주의가 정통신앙을 대표하는 사조가 되었고, ‘복음’ 혹은 ‘복음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 근본주의 신학이 복음주의 신학의 탈을 쓰고 교회 안에서 정당화되고 있기에 성도들은 근본주의 신학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것을 ‘비복음적’이거나 ‘비기독교적’이라고 느낀다.
이러한 분위기는 신학교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신학교들은 ‘성서비평’을 기준으로 진보 혹은 보수 신학교로 구분되고 있다. 신학교 입학 후 첫 수업인 구약개론 시간에 성서비평의 내용을 가르치는 교수를 향하여 쌍심지를 켜는 학생들의 존재는 클리셰(cliché)가 되어버렸다. ‘복음주의의 탈을 쓴 근본주의’로 단단히 무장한채 신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은, 신학교에 배움이 아닌 근본주의 신학의 ‘전도’를 위해서 출석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학교 안에서 ‘잘 배우고 나온 학생들’도 교회 현장에 가면 위축된다. 조금이라도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근본주의 신학의 검열에 걸려 이단으로 몰리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목회를 이어간다. 한국교회의 강단은 그러한 방식에 의해 ‘근본주의 신학’으로 더욱더 획일화 되어간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근본주의 신학을 ‘체화(體化)’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투사처럼 투쟁한다. 이성과 자율성을 가진 세상을 적대시하게 되고, ‘세속과의 분리’가 복음적인 인간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는 없고,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걷는 교회의 모습만 존재한다. 결국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의 탈을 쓴 근본주의’는 하나님을 교회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스도인을 반지성인으로 만드는 근본주의 신학
그렇게 한국교회 안에서 ‘복음’이라는 단어를 강탈한 근본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을 반지성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반기독교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반지성인’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필자는 몇 해 전에 들었던 한국교회 어느 담임목사님의 ‘창조과학’ 설교를 잊지 못한다. 그 목사님은 지구에 ‘잃어버린 24시간’이 있고, 그 정답이 성경에 있다고 말했다. 여호수아의 기도가 태양을 멈추었을 때, 히스기야의 기도로 태양이 10도 뒤로 물러갔을 때 지구 안에 ‘공백의 24시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분은 창조과학을 근거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사모해야’ 믿음이 충만해 진다고 설교했다. 재미있는 것은 후에 그 목사님의 프로필을 검색해보니 대한민국 지성인들의 학문터로 여겨지는 S대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학부에서 이공계열을 전공했고,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었다. 남들보다 늦게 신학공부를 시작했던 그 목사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을 목사가 됨과 동시에 버려버린 것처럼 보였다.
필자가 목격한 근본주의 신학은 해충(害蟲)과도 같았다. 근본주의 신학이 마음밭에 떨어지면, 그 사람이 이전에 심었던 지식의 작물은 모두 갉아 먹혀버린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복음주의의 탈을 쓴 근본주의’ 이외의 것들을 모두 버리면서 반지성인이 되어간다.
먼저 강단이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복음주의의 탈을 쓴 근본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반지성주의와 극단적 이원론, 배타성과 폭력성, 공공성 부재와 대사회적 신뢰도 하락 등, 한국교회의 문제적 현실의 뿌리에 근본주의 신학이 있음을 인식하고 끊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위로부터의 변화와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모두 수반되어야 하는데, 먼저는 ‘아래로부터의 변화’, 즉,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이 바뀌어야 한다. 성도들을 투사로 내모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세상을 투쟁의 장소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선교적 공간으로 바라보게 해야 한다. 배타성과 폭력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양해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하나님이 아닌, 우주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강단은 이제 근본주의 신학의 검열에 의해 이단이 될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근본주의 신학에 의해 이 땅에서 복음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고백뉴스 논설위원단 /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