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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을 “상상”케 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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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1년 11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비욘드코로나 목회전략 세미나> 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1. 미디어와 종교’ 연구

나는 미디어/커뮤니케이션 분야를 공부한다. 세부 전공은 ‘미디어와 종교(media and religion)’로서, 그동안 서로 큰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던 ‘미디어’, 그리고 ‘종교’가 서로 만나는 지점이 사실은 다양할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교차점을 탐색, 분석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학술 분야 ‘미디어와 종교’는 1980년대부터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태동한 신생 분야로서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현상, 즉 ‘제도종교의 영향력 감소’ 그리고 ‘미디어의 사회적 중요성 증가’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관찰에서 시작되었다. 종교인구가 줄어들고 공적 영역에서 제도종교의 역할이 감소하는 이른바 종교의 개인화(individualization) 및 사사화(privatization) 현상을, 날로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는 사회제도인 미디어와 따로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전통적으로 제도종교가 담당했던 기능과 역할을 미디어가 점진적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되었다. 미디어학과 종교학을 비롯해, 사회학, 신학, 문학, 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학문 전통에서 모인 연구자들은 미디어와 종교가 만나는 다양한 현상을 취합하고, 그 둘의 관련성이 현대 사회의 사회, 문화, 정치 영역에서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논의한다.

이 분야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매우 빠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처음 독립된 학술 분야로 정착한 미국과 서유럽뿐 아니라 동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곳곳에서 미디어와 종교가 교차하는 다수의 접점이 발견되고 있으며, 각 사회를 깊이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이 분야의 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발생한 글로벌 차원의 혼란과 후유증은 미디어와 종교가 만나는 현상을 양산함으로써, 이 분야에 대한 학술적 관심을 큰 폭으로 키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

사실 한국의 미디어와 종교 분야를 전공하는 연구자는 아직 소수에 그친다. 미디어학 내에서 종교에 관한 관심은 아직 본격적이지 않고, 종교학이나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미디어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최근 젊은 연구자들 가운데 미디어와 종교의 교차점에 관한 관심이 자생적으로 커지고 있고 이 분야 연구로 학위를 받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해외에서처럼 한국에서도 이 분야의 중요성이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미디어와 종교를 연구하면서 나에게는 질문이 하나 있다. “지금 세속사회는 여전히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누구나 쉽게 짐작하듯이 종교를 향한 세속사회의 시선은 매우 차갑다. 그리고 그 시선의 온도는 점점 더 낮아지는 중이다. 세계 곳곳에서 종교는 전쟁과 분쟁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테러와 폭력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이데올로기 공급원으로 설명된다. 평화와 화해의 주체이기보다는 갈등과 혐오의 주체로 인식된 지 오래다. 우리 사회에서도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비난과 조롱의 수준에까지 나아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세속사회가 종교에 관한 최소의 관심마저 거두고 있다는 비관적인 통계마저 등장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개신교에 대한 비판이 가장 신랄하다는 것은 아프지만 주지의 사실이다.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상식과도 같고, 젊은 세대가 주도하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이런 태도가 아예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미디어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신문과 방송뉴스 같은 저널리즘 미디어에서도, TV드라마나 영화 같은 엔터테인먼트 미디어에서도 개신교 비판은 아주 쉽게 발견된다.

“지금 세속사회는 여전히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미디어 연구자로서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미디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또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신교를 비롯해 종교를 다루는 미디어의 외형과 내용을 잘 분석하고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해석한다면, 종교에 비판적인 세속사회가 여전히 종교를 필요로 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미디어가 존재하고 운영되는 시스템의 특성, 콘텐츠를 생산/유통/판매/소비하는 맥락 등을 고려하면 그 해답을 미디어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동안 나는 한국 사회에서 미디어와 종교가 만나는 여러 지점을 분석해 왔다. 종교와 종교인을 다루는 언론기사, TV드라마 속 개신교, 초월적 존재와 초자연 현상을 다루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대중문화 속 힐링담론, 제도종교의 미디어관, 미디어 수용자의 종교적 의미생산 등이 분석 대상이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위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2. 미디어의 ‘비판’ 그리고 ‘칭찬’

제106회 총회가 정한 주제는 “복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이롭게(With the Gospel, Renew the Church and Restore the World)”이다. 이 중에서 내가 맡은 강의는 “세상을 이롭게” 부분이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복음, 그리고 교회. 이 시대 한국교회가 집중해야 할 매우 중요한 지점임이 분명하다. 2000년대 이후 개신교가 맞닥뜨린 엄혹한 현실에서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는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개신교를 향한 비판의 핵심에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탈한 종교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 이는 복음이 말하는 세상과의 관계 설정과도 너무 멀어져 버렸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그 출발이 종교에 대한 세속사회의 기대를 읽어내는 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는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한 부분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사회가 공인한 ‘제도종교’가 마땅히 담당해야 할 고유의 기능과 역할을 상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사회 운영의 기본 원리인 ‘세속성(secularity)’을 기반으로 종교에 부여한 사회적 역할이다. 종교에 대한 세속사회의 기대는 시대의 흐름과 무관한 본질적인 역할도 있지만, 각 시대의 상황과 조건에 민감하게 요청되는 역할도 있다.

내가 미디어 속 종교를 분석하는 이유는 미디어가 두 차원 모두에서 세속사회가 종교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읽어낼 수 있는 유용한 자원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를 향해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일갈하는 뉴스 앵커의 코멘트나, 코로나 초기에 현장 예배를 고집하는 교회를 비꼬는 신문 만평의 구성에서도 종교에 대한 기대를 읽어낼 수 있다.

먼저, 종교에 대한 미디어의 ‘비판’으로부터 그 기대를 읽을 수 있다. 미디어는 세속사회의 기본 규범인 세속성을 바탕으로 종교를 평가한다. 종교에 부여된 역할을 제대로 담당하지 못한다면 그 종교는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2000년대부터 개신교에 대한 미디어의 비판이 본격화되었는데, 이때는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가 주요 권력으로 규정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이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존재 이유로 설정하는 자유주의 기반의 저널리즘 미디어가 다른 종교보다 개신교에 대해 더 비판적일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설명하는 이유가 된다. 엔터테인먼트 미디어에서도 그 비판적 태도는 점점 강화되고 있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오징어 게임>이나 <원더우먼>, <구경이> 등의 드라마에 등장한 개신교인 캐릭터는 제작자의 악의적 의도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러한 미디어의 재현이 이미 사회 전반에 일상화된 개신교 비판 정서에 기대어 만들어진다는 점을 거듭 확인시켜준다.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개신교를 향한 미디어의 비판은 크게 네 가지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1) 독선과 배타성의 종교, (2) 권력을 추구하는 종교, (3) 내부적으로 분열된 종교, (4) 성장주의/물질주의를 추구하는 종교라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미디어 속 개신교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위의 지적은 한국교회 내에서도 오래전부터 내부 개혁과 갱신을 위해 열거해 오던 항목들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디어의 비판에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억울해하기만 할 일은 아님을 시사한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 국면은 한국교회의 신뢰도 하락을 한층 가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신교의 유통기한 소멸”을 거론하고 “저들의 천국에 가지 않겠다”는 언론의 쓴소리는 세속사회의 신뢰를 회복할 가능성에 대한 짙은 회의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종교에 대한 세속사회의 기대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사회적 재난을 당한 세속사회에는 종교가 담당해주기를 바라는, 그리고 종교만이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이 존재한다. 재난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며, 재난을 초래한 근본 원인을 추적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번 코로나 국면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냈는지 뼈아프게 성찰해야 한다.

한편, 미디어가 종교를 ‘칭찬’할 때도 세속사회의 기대를 읽어낼 수 있다. 세속성을 기준으로 설정해 놓은 종교의 기능을 다 하지 못했을 때는 비판이, 그것을 충실히 담당했을 때는 칭찬이 따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미디어의 종교 칭찬을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찾을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옥한흠 목사의 죽음을 보도하는 기사, 4박 5일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일거수일투족을 이례적으로 따라다닌 언론 보도, “힐링(healing)”이라는 종교성 강한 용어를 둘러싼 대중문화 현상, “지저스웨거”라 불리는 개신교인 래퍼 비와이 등이 그것이다.

이런 사례에서 얻은 통찰을 통해 미디어는 종교가 (1) 약자의 편에 섰을 때, (2) 불의에 저항할 때, (3) 사회의 통합과 화해에 기여할 때, (4) 물질주의를 거스를 때 칭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모습들이 세속사회가 종교에 기대하는 바에 잘 부합한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3. 세상이 종교에 ‘기대’하는 것

이상에서 살펴본 미디어의 ‘비판’ 그리고 ‘칭찬’을 둘러싼 함의를 종합하면,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세속사회가 종교에 대하여 품은 기대는 아래 네 개의 항목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다.

(1)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리매김하기를….

첫 번째 기대는 종교가 사회의 일원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종교가 최소한의 세속규범에 동의하는 집단이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집단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와 규범에 따라 신앙 활동을 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세속규범과 충돌할 경우, 사회가 합의해 놓은 규범을 우선해야 마땅하다는 논리다. 그것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종교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따라야 할 세속규범과 상식적 원칙을 위반한다면 제도권으로 공인한 위상과 권리를 존중할 수 없다.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하는 것은 세속사회가 제도종교에 맡긴 기능과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

미디어가 배타성과 독선을 개신교의 문제점으로 규정하고 이를 비판하는 근본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개신교는 세속사회와의 갈등이 생기면 언제나 종교집단으로서 자신들의 특수성을 우선해 달라고 고집스럽게 요청하는 집단으로 재현된다. 특히 개신교 신앙은 타 종교와 세속 이념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위상을 지닌다고 주장하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 어떠한 입장과 세력에도 매우 공세적인 태도로 대응하는 집단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기대는 개신교의 공격적 선교/전도 방식, 광장 정치로 연결된 극단적 신앙, 코로나 초기 방역 정책에 대한 반발 등을 비판하는 미디어 텍스트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항목은 ‘소통 가능한 종교’를 향한 기대와도 통한다. 세속사회와 종교의 소통과 대화, 진지한 토론은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한데, 세속사회가 합의한 가치와 규범마저 인정하지 않는 집단이라면 말이 통할 리 없다. 이러한 기대를 통해 특정 종교집단이 근본주의적 성향을 띠게 될 때 세속사회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다. 코로나19 국면이 일깨운 ‘복음의 공공성’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 전환에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이다.

(2) 개입하기, 편들기, 행동하기를….

종교에 대한 세속사회의 두 번째 기대는 각종 사회문제에 뒤로 물러나 있지 말고 무언가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면 기획 기사, 종교집단과 종교인에 대한 평가 등에서 종교의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하고 칭찬할 때 거듭해서 확인된다. 미디어는 사회적인 쟁점과 갈등이 발생하면 종교가 기계적 중립을 핑계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대신 해당 사안에서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때론 종교의 목소리를 통해 어떤 이해관계에도 치우치지 않고 사안의 본질을 꿰뚫는 시각은 무엇인지를 확인하려는 의도마저 엿보인다. 종교는 불편부당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테다.

물론, 사회적 쟁점을 놓고 진보 혹은 보수라는 이념 논리 중 어느 한 편에 속하라는 말은 아니다. 진영논리에 기대어 자기 편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종교가 현실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수행자(player)의 위치에 서라는 주문 역시 아니라는 것은 종교의 광장 정치에 대한 미디어의 부정적 반응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종교를 다루는 미디어가 명확하게 드러내는 건 종교는 언제나 약자의 편, 그리고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는 미디어의 이념 성향과 관계없이 일관적으로 나타난다.

세속성이 종교에 부여한 본질적 역할은 세속사회의 쟁점과 갈등 속에서 언제나 약자의 편과 정의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사안의 성격에 따라 어떠한 입장이 약자의 편이 될지, 또 정의를 실천하는 길일지는 분명하지 않다. 임의로 하나의 입장을 정해둔 채 종교는 반드시 그것을 취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종교의 철학적, 신학적 토대에는 사회적 약자를 돕고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이 마땅하다는 세속성의 기본 가정이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정은 복음이 말하는 바와 매우 닮아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3) 정신적, 영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를….

세 번째는 정신적 가치, 영적인 가치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종교가 담당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돈과 물질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이 시대에 종교에 기대되는 역할은 그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물질만능주의 세태에 종교는 탈(脫)물질주의적 가치와 실천을 도모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사회제도로 규정된다. 종교가 그런 흐름을 거부하지 못할 때는 신랄한 비판이, 세태를 거슬러 돈과 물질을 넘어선 영역의 가치를 우선할 때는 응원과 칭찬이 이어진다.

법정 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추모 분위기나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시 그의 발언과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미디어의 열광적인 반응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킨 사례라고 볼 때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허세와 과장으로 저항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힙합 문화를 빌려, 물질적 성취를 넘어서는 영원의 가치와 초월적 존재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래퍼 비와이에게 젊은 세대의 반개신교 정서가 일시적으로 유예하는 현상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세속사회가 종교에 이러한 역할을 맡기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 기대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회의 현실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매우 비관적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 세속사회 역시 그 비관적인 사회를 초래한 근원에 돈으로 모든 가치를 치환하려는 물질주의 문화가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디어는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제도 가운데 종교가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 흐름에서 우리 사회를 빠져나올 수 있게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회제도가 바로 종교라고 말한다.

(4) 궁극적으로, 세속사회에서 ‘대안적’ 가치의 원천이 되어주기를….

마지막 항목은 위에서 정리한 종교에 대한 세속사회의 기대 전체를 종합하는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그것은 종교가 세속사회 속에서 뭔가 ‘다른’ 존재가 되어 달라는 기대이다. 세속사회를 지배하는 가치, 규범, 질서와는 차별적인 모습을 종교가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그 차별적인 모습이 절망적인 세속사회의 현 질서를 대신할 대안으로 기능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자리한다.

사회적 현실에 대한 절망, 그리고 현 질서가 초래한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갈수록 종교가 대안적 가치의 원천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기대는 커진다. 종교만의 궁극성(ultimacy)으로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근원적 질문에 대해 본질적이고 최종적인 차원에서 답을 제공해 달라는 것이다. 점점 더 눈앞의 손익계산과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는 현대 사회에서 유불리를 뛰어넘는 사랑과 자비의 언어로 현실을 재해석하고, 나아가 이 땅에 실현할 더 나은 삶의 모델을 상상하게 할 수 있는 사회제도는 많지 않다. 결국 종교는 세상 질서와의 차별성을 잃지 않을 때, 그리고 그것이 유력한 대안으로 인정받을 때 사회적 필요와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

종교가 세상과 똑같지 않기를 바란다는 세속사회의 기대가 세상과 새로운 관계 설정을 모색하는 한국교회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는 세상이 종교에 기대하는 ‘다름’은 거룩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회의 목표와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사명과 세속사회의 기대가 서로 만나는 지점이다. 이는 세상과 소통의 연결고리를 찾는 교회의 노력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4. “다른” 세상을 “상상”케 하는 교회

지금까지 세속사회가 종교에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교회”란 바로 “다른 세상을 상상케 하는 교회”라고 규정한다.

(1) “다른” 세상

왜 “다른” 세상인가? 현재 한국 사회에는 고통의 신음이 갈수록 커져만 간다. 몇 해째 OECD 최고를 기록 중인 자살률을 비롯하여, 청년 세대의 우울증 증가, 악화 일로인 소득/자산 불평등 및 양극화 등을 고발하는 사회 지표들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현실이 얼마나 암울한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전후의 극심한 가난에서 해방해주었던 물질적 풍요 추구의 시스템이 우리를 더 나은 세상으로 데려다줄 것 같았지만, 그 과정에서 배태된 수많은 사회문제는 그것이 결코 정답이 아니라는 걸 절감케 한다. 효율성과 경제성으로 사람의 가치와 삶을 평가, 재단하는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회의이다. 더구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경제, 정치 시스템의 문제는 비단 한국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 구조적 한계가 초래한 생태 파괴와 새 감염병으로 인한 고통은 전 세계 차원에서 깊어지고 있다.

세상은 지금 매우 큰 고통과 결핍을 경험하고 있다. 미디어에는 그 결핍과 동반된 모든 생명의 신음과 절망이 넘쳐난다. 최근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한국의 대중문화 상품 <기생충>, BTS, <오징어 게임>이 모두 종말론적 절망의 에토스를 바탕으로 생산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핍은 ‘다른’ 세상을 향한 욕망으로 표출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집단적 결론이다. 현재와는 다른 대안적 가치와 질서를 애타게 모색한다. 그런 가치와 질서로 운영되는 사회를 절박하게 꿈꾼다. 다른 세상은 이런 모습이라고,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고 보여주는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린다.

(2) 다른 세상을 “상상”

왜 “상상”인가? 학자들은 사회변혁의 과정에서 상상(imagination)과 영감(inspiratio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집단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려내는 상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절망이 바로 새로운 세상으로의 전환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먼저, 대안적인 가치가 제시되어야 한다. 현재의 사회질서를 만들어내는 가치와 규범을 대신할 새로운 가치와 규범이 대중에게 선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탄탄한 대안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해야 한다. 그래야만 현 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전환을 위한 의미 있는 노력이 시작될 수 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집단적 상상이 실현되는 과정에는 매우 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모든 상상이 바로 현실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새로운, 대안적인 세상에 대한 상상 없이는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금도 끊임없이 다양한 가치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합하는 상징적 투쟁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속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대안이 제시되고 있는지, 그 대안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있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미디어는 종교가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3) 다른 세상을 상상케 하는 “종교”

왜 “종교”인가? 세속사회는 미디어를 통해 다른 세상을 상상케 하는 역할을 종교가 감당해야 한다고 전한다. 세속성이라는 원리에 따라 종교에 부여한 역할의 총합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상상은 세속사회와는 ‘다른’ 가치와 질서로 움직여지는 사회제도일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속성이 규정한 종교의 이념형(ideal type)은 그 자격을 갖추었다. 미디어가 말하는 종교에 대한 기대는 이를 드러낸다. 세속사회의 일원으로서 언제나 정의의 편과 약자의 편에 서 있으며,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정신적, 영적 영역의 중요성을 일깨울 수 있고, 세속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거스르는 대안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사회제도는 종교뿐이다. 비록 현실 종교가 세속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실망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고 할지라도, 종교의 이상적인 모습을 회복한다면 세속사회의 변화를 위한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미디어의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대가 아직 남아 있다는 방증이 된다. 세속사회가 설정한 종교의 이상적 역할에 턱없이 모자란 현실 종교에 대한 질책이다. 앞에서 언급한 연구자로서 나의 질문, “지금 세속사회는 여전히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다. 세속사회는 아직 종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은 듯하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종교인구가 감소할 뿐 아니라, 아예 종교에 관심을 두지 않는 비종교인의 비율이 크게 치솟고 있다. 특정 대상에 대한 무관심은 그를 향한 필요와 기대 자체를 거두어들였다는 표현이다. 종교에 대한 거듭된 실망이 오래도록 축적된 결과일 것이다.

(4) 다른 세상을 상상케 하는 “교회”

교회는 세상에서 대안적 가치와 실천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성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거룩함의 존재로 살아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세속사회에서 ‘다름’의 모델이 되어서 세상의 가치와 질서의 진정한 대안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런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

결국 “복음으로 교회가 새롭게 되기”와 “복음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기”는 서로 다르지 않다. 종교를 다루는 미디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교회가 대안적 가치와 실천의 공동체로서 바로 설 때, 교회를 향한 세상의 관심과 호감은 높아질 것이며,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기 위한 노력에 반드시 교회의 도움을 청할 것이라는 메시지다. 교회가 복음으로 새롭게 되면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사실 오순절 다락방 사건 이후 예루살렘에 만들어진 첫 교회 이야기(행 2:44-47)는 이 교훈을 이미 가르쳐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공동생활과 공동소유, 필요에 따른 나눔, 교제와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낯선 공동체였고, 그 삶의 방식은 예루살렘에 모여든 외국인과 나그네에게도 차별적이지 않았다. 당시 지중해 지역을 단일한 방식으로 지배하던 로마제국에서는 모든 것이 로마 황제의 손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대부분의 토지는 황제의 것이었다. 귀족, 지주, 평민, 자유인, 노예 등 명확한 계급으로 나누어진 신분사회였으며, 특히 노예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엄청났다. 여러 산업이 발달해서 무역을 시작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초보적인 형태지만 시장과 투자의 개념도 도입되었다. 화폐와 세금 제도가 발달함으로써 돈을 제일로 생각하는 배금주의도 강해졌고 쾌락주의와 도덕적 부패도 무척 심했다.

이런 시대를 살던 당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첫 교회가 어떻게 보였을까? 첫 교회의 삶의 모습은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그야말로 ‘대안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성서는 첫 교회의 이런 모습이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고 기록한다. 어쩌면 이 호감은 당연한 결과다. 나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성공을 위해서는 남을 밟고 일어서야만 하는 세상의 질서, 물질과 돈이 우상이 되어서 그 외의 것들의 가치는 땅바닥에 떨어져 버린 힘의 논리에 힘겨워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첫 교회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고 또, 급진적이었다. 다른 세상을 상상케 하는 종교의 모습이다. 복음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5. 미디어와 종교 연구자의 한국교회를 향한 제언

마지막 장에서는 이번 총회 주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크지 않지만, 미디어와 종교 연구자로서 평소 미디어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에 전하고자 했던 제언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미디어를 새롭게 봐야 합니다.”

한국교회에서 미디어에 대한 관심과 이해, 전문성은 아직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교단과 개별 목회, 그리고 신학교육 차원에서 미디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시대라는 점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특히 젊은 세대와 청소년을 향한 목회와 신앙 교육에서 미디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빠진다면 그 결과는 긍정적일 수 없다.

그동안 미디어와 신앙의 관계에 대한 개신교의 시각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독립적’ 관계로서 미디어와 신앙을 별개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둘 사이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시각이다. 개혁주의적 신앙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상관없는 영역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시각은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둘째, ‘대립적’ 관계로서 미디어는 개인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개신교를 공격하고 왜곡하는 주체로 규정하는 시각이다. 미디어와 대중문화의 생산 이면에는 악한 세력이 존재한다고 상정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미디어를 소비하는 것이나 긍정적인 의미를 끌어내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미디어를 직접 활용하거나 미디어 속에서 함의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용납될 수 없다. 또한 미디어가 지닌 영적 의미는 초월적 차원으로 한정될 위험도 있다. 셋째, ‘도구적 관계’로서 미디어는 기독교의 복음을 세상에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도구로 규정된다. 미디어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기 때문에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므로, 교회가 선한 목적을 가지고 활용한다면 선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미디어를 통해 선교적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 미디어학의 연구 결과를 통해 지지받기 어려운 주장이기도 하다.

나는 이 시각들이 지닌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한계 역시 크다는 점에 주목하여 또 하나의 시각을 제안한다. 그것은 미디어를 세상과의 소통에 유용한 통로로 규정하는 것이다.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오래되었지만, 소통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깊지 않았다. 나는 소통이란 본질적으로 쌍방향을 지향하므로,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세상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미디어는 소통을 위한 교회의 노력에 매우 유용한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먼저, 한국교회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읽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개신교를 향한 미디어의 비판과 칭찬은 모두 세속사회가 개신교를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를 잘 읽어냄으로써 한국교회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읽을 수 있다. 또, 미디어는 세상 자체에 대한 이해의 통로가 된다. 세상의 가치, 질서, 욕망, 결핍, 대중의 삶을 읽어내는 데 미디어만큼 유용한 교재는 없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그 시작은 세상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미디어를 그 통로로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2) “미디어의 교회 비판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미디어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교회를 향한 미디어의 비판 역시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 미디어의 개신교 비판은 주로 “공격,” “비난,” “비방,” “폄훼,” “조장,” “조롱,” “의도적 모욕,” “흠집 내기” 등의 언어로써 설명되었다. 비판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의 정서가 만들어낸 언어였다. 하지만 미디어를 세상과 소통의 통로로 규정하면 단편적인 분노와 억울함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미디어의 비판이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들여다보고, 비판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미디어 속 개신교 비판 수위를 놓고 “이대로 좋은가?”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왜일까?”를 궁금해하고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를 읽어내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미디어의 개신교 비판은 1990년대부터 본격화되어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심화하기 시작한다. 2000년대는 개신교 일부에서 본격적인 정치 세력화 움직임이 포착된 시점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미디어는 개신교를 하나의 ‘권력’으로서 규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디어가 타 종교에 비해 개신교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을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라는 미디어 고유의 사회적 역할로 설명한다. 이는 2000년대 들어 상징영역에서 개신교의 가시성이 증가하고 비판적 정서가 급격히 불거진 맥락으로 작동한다.

또한, 이 시기부터 개신교만이 아니라 제도종교 전반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증가한 것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사회 전반에 나타난 반권위, 개인주의, 탈 중심주의, 네트워크 기반 커뮤니케이션 등의 영향으로 제도종교 전반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었으며,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이런 흐름은 강력하게 나타난다. 서구에서 영적이되 종교적이지는 않은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 집단이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게 한국에서도 제도종교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에 대한 관심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나안 성도’ 현상 역시 이런 흐름에서 설명될 수 있다. 미디어의 개신교 비판은 이러한 맥락들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3) “‘대중 언어’를 잘 읽고 쓰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미디어 환경이 급속히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1인 미디어, 지각편향, ‘가짜뉴스(fake news)’ 등 미디어와 관련한 사회적 쟁점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사회 전반에서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의 중요성이 부상하고 있다.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읽기’)과 미디어를 통해 자기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쓰기’)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도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한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나는 한국교회에 ‘대중 언어 리터러시’ 역량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언어(language)의 문제로부터 출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언어는 ‘종교 언어’인데, 종교 언어는 세상이 알아들을 수 없다. 또, 한국교회에는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전문성도 크게 떨어진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 사이에 깊이 있는 소통이 가능할 리 없다. 세속사회와의 관계에서 개신교가 점점 더 단절되고 게토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고통스러운 진단의 이유 중 하나다. 한국교회는 ‘대중 언어’로 읽고 쓰는 능력을 계발하는 데 힘써야 한다.

여기서 ‘쓰기(writing)’는 교회의 메시지가 대중에게 어떻게 들릴 것인지를 헤아리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공공 영역에서 교단의, 교계 지도자의, 개신교인의 발언과 행위가 세속사회의 상식과 규범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인식될 것일지를 미리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실 ‘쓰기’ 능력은 ‘읽기(reading)’ 능력을 잘 갖추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세상과 대중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잘 분별할 줄 아는 것이다. 대중 언어의 읽기 능력은 미디어를 통해 키울 수 있다. 저널리즘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모두 세상 읽기의 대상이 된다. 이를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세속 저널리즘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과 엔터테인먼트 미디어를 값싼 오락거리 이상으로 평가하는 관점을 기르는 것이다.

(4) “한국교회를 향한 세속사회의 ‘기대’를 읽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글 전체에서 주장한 것처럼 미디어를 통해 종교를 향한, 한국교회를 향한 세속사회의 기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개신교를 향한 미디어의 비판에 내재된 역설적 기대를 찾아내야 하고, 미디어의 호의적 반응에 드러난 기대 역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시대를 초월하는 종교 전반에 대한 본질적 기대뿐 아니라, 시대의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예민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기대를 복음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에 비추어 진단하고, 교회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사명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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